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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별들의 행렬

2011-06-19

이성자, 별들의 행렬

 

이성자(1918-2009)가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51년이며, 파리 몽파르나스 근처에 있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mie Grande Chaumire)에서 미술을 배운 후 미술계에 데뷔했다. 이 아카데미는 고갱, 모딜리아니, 마네, 레제 등이 거쳐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에게 정확히 개인교습을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존중하는 아카데미의 학풍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국내 작가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작품활동을 펼치기 위해 파리행을 택하였다. 아직 화랑이나 미술관 등 인프라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터라 신인에서부터 중견화가에 이르기까지 부푼 꿈을 안고 파리로 떠났다. 그중에는 남관, 이응노, 김환기, 김흥수, 한묵, 김환기, 권옥연, 이세득, 김창락, 변종하, 문신, 함대정, 이항성, 김창열, 방혜자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성자는 그보다 훨씬 앞서 파리유학을 결행하였으며 거의 반세기를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거의 매년 개인전을 갖는 열정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입문할 당시 짧은 기간 동안에 보인 구상화를 예외로 한다면 거의가 추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50년대 작업이 잔잔한 색채를 쌓아가는 작업이었다면 6,70년대 작품은 화문석이나 삼베의 짜임새를 연상시키는 구성법을 선보인다. 물감을 쌓아가면서 그 위에 다시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직조된 삼베처럼 내밀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 당시의 작품을 최순우는 “옅고 짙은 주홍색계와 흑색의 또렷한 토막빛깔들이 가로세로 얽혀서 흥겹게 구축된 즐거운 둥지 같은 그림”으로  기술한 바 있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부터는 산과 바다, 그리고 숲과 같은 자연적인 모티브에 착안한 회화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업이 발단이 되어 80, 90년대 중반까지 선명한 색채가 두드러진 풍경추상화가 이어진다. 마치 산이 허공에 뜬 것처럼 무중력상태에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색동으로 된 반원이나 색띠가 등장한다.


초기 작품이 그런대로 구도에 앞뒤가 있는 반면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이런 공식이 깨진다. 즉 산 아래에 달과 색동으로 된 반원 등이 떠 있거나 별이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띤다. <대척지로 가는 길> 연작은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면서 내려다본 얼음으로 뒤덮인 산야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알래스카를 경유하여 파리에서 한국을 오갈 때 내려다본 북극의 신비한 풍경에 매료된 것을 계기로 대표작의 전조(前兆)를 예감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5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작가는 우주를 담는 회화에 있는 힘을 다 쏟는다. 산과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는 없어지고 화면은 색점으로 채워진다. 조그만 색점들이 화면을 채우며 마치 한폭의 그림이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광할한 우주를 연상시킨다. 그 우주에서는 앞뒤도 좌우도 존재하지 않고 크고 작은 끝없는 별들의 행진이 이어질 뿐이다. 공간이 경계없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가 궁극지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작품들이 가장 이성자가 추구하는 회화세계를 잘 웅변해주지 않나 싶다. 여기에서 이성자가 그토록 애용하던 색동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꿈과 상상의 세계가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색조에 있어서도 초기작품에서 볼 수 있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조가 운무가 드리운 창공을 보듯이 화면에 깔려 있다. 종전에 보았던 강렬한 원색의 물결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여러 색의 겹침과 어울림이 중시되고 저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듯이 투명성을 간직하고 있다. 곳곳에 별자리 모양의 드리핑효과를 주어 침묵 가운데 진동을 느낄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작가는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 <우주의 축제>, <직녀성에 있는 나의 오두막>, <금성의 축제>, <페가수스의 도시>, <은하수에 있는 나의 오두막>과 같은 제목을 달았다. 시종 별들이 반짝이고 에너지로 충만하며 볼수록 신비한 우주가 그의 이상향이 된 것일까, 우주에 대한 열망이 그를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의 공간이요, 심연의 심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 속에 자신을 맡기려한 어떤 갈망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우리가 보지도 않고 믿는 신비에 접근시켜주고 우리를 자신과 세계를 깊이 인식케 해주고 확대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한정되고 범용한 틀에 박힌 현실 속에서 형태의 전달과 지각의 힘으로 우리의 이상적인 갈망의 참된 가치를 가르쳐주는 것이 예술가이다.”(Claude Bouret)


클로드 브레의 말처럼 예술가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고 가지 못한 곳을 가보게 해주는 안내자라면, 이성자는 그런 역할을 톡톡히 감당해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무수한 입자로 채워져 있다.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의 별빛처럼 작가는 입자 그 하나하나에 표정을 담았다. 특별하게 죽은 입자는 발견할 수 없고 모두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화면이 작은 세계라면 그 세계는 형형한 존재, 즉 투명한 영혼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했다.


흔히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저 너머의 세계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성자도 한때는 대지의 모습을 화면에 담으려고 애쓴 적이 있다. 도시의 역동성에 착안한 것이나 자연 풍경을 모티브로 삼는 작품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는 점차 환상적 비전이라는 계단을 타고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궁극에는 영원과 무한까지 투시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우주의 응시는 곧 무한의 교감과 초자연적 세계와의 접촉으로 나간다. 작가는 무거운 주제를 매우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의미한다.



글쓴이: 서성록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출처: 미술평단 2011 여름 제 101호-<경남 미술의 點景 -6인의 작가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