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 - 화가란 무엇인가
2017-01-16I.
여기 구순을 넘긴 한 노익장의 화가가 경상남도를 대표하는 공공 미술관에서 큰 규모의 전시회를 갖는다. 남들은 죽어 10주기쯤의 회고전을 할 계제에 이성자 화백은 지금도 열정으로 작업에 임하여 그 결과물들을 선보이니 작가와 미술관 그리고 관객인 우리 모두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있는 그의 작업실 겸 삶의 정착지인 ‘은하수’에서 방금 날아왔다. ‘극지’를 거쳐 동서 문화의 뿌리인 절대 공간을 수시로 넘나드는 이 노익장의 여성은 정녕 화가이기를 잘했고, 아니 타고났을 정도의 저력(底力)과 끈기로 동서양의 이성과 감성을 골고루 겸비하여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독특한 존재이다.
나는 지난 해 『이성자, 예술과 삶』(생각의 나무, 2007)에 이성자 선생을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화가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를 나혜석, 최욱경과 비교했다. 거기에서 이성자를 그 둘의 장점을 갖추었으면서도, 그 둘의 단점을 극복한 불굴의 의지를 지닌 화가로 기술한 바 있다. 비교하건대,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 나혜석은 화가로 칭할 만큼의 절대적인 작품수가 부족한 작가이다. 예술가로서의 타고난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로서 이성자 만큼의 국제적인 감각을 지녔으되 최욱경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했다.
일제시기 동경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래현과 천경자가 비슷한 세대로서 비견할만하나, 파리에서 기반을 다진 이성자와는 그 활동 영역의 반경이 달랐다. 박래현과 천경자가 국내에서 활동했다면 이성자는 한국보다 유럽이 그의 활동 무대였다. 그 세대의 작가들로서 남녀를 막론하고 이성자 만큼의 국제성을 갖춘 작가가 일찍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랴. 아마도, 통영 출신의 작곡가 윤이상이 유럽을 무대로 이성자처럼 국제적인 인지도를 획득한 같은 세대의 예술인일 것이다.
II.
이성자는 그의 일본 유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년, 학창시절을 경상남도에서 보냈다. 군수였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하동, 김해 창녕 자연과 함께 자라, 마지막으로 가문의 터전인 진주 일신여자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의 근간으로 자리 잡을 모든 감성적 정서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을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그의 기억과 글, 그리고 회화와 판화 작품에 고스란히 베어 나온다. 특히, 1951년 파리로 건너가 미술에 입문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밟는 1960년대 이후 그가 이루어낸 성공의 작품들은 ‘여성과 대지’라는 제제(提題)가 말해주듯 그의 성장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지성과 모성, 거기에 재능을 두루 갖춘 한 여성의 질곡(桎梏)의 삶을 –그것도 현대미술의 본 고장인 프랑스에서 성공/실패의 가시적인 문제는 둘째로 치되, 어엿한 전업작가로서 어떻게 57년이란 세월을 버텨왔는지 더욱 새록새록 궁금하지만-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이미 『이성자, 예술과 삶』에서 다른 저자(이지은, 강영주, 심상용)들도 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여정에 관하여 어느 정도 밝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의 견해와 미술사적 논지가 같은 강영주 선생의 더욱 확연한 주장은 여기에 한번 더 요약하여 싣고 싶다. (위의 책, 88쪽)
1. 이성자는 남녀 화가를 통틀어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작품 활동을 한 최초의 한국 미술사라는 사실.
2. 서양화 도입 초기의 일본 영향에서 벗어나 서구 미술계와 직접 교류한 선구자의 뒤를 잇고 있다는 점.
3. 해방 이후 전업 작가로서 유럽에 정착한 첫 세대로 뚜렷한 자기 세계를 확립한 이성자는 한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증거라는 점.
4. 아흔이 넘은 지금도 국제적인 시야를 갖고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우리 미술사에 유래가 없는 작가라는 점.
이러한 이성자의 억척스러운 예술활동은 서구로 나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정착하려는 후학들에게 귀감이 된다는 강영주 선생의 노지는 세계화의 내실이 부족한 우리에게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지적이기도 하다.
III.
이성자의 예술과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도대체 화가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더욱 가시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치열하고 끈질기게 그림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는 분명 그와 비슷한 세대의 한국 여성들이 겪었던 보편적인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질서에서 이탈한, 그것도 본격적으로 이탈한 최초의 여성 예술인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특히 세 아이의 어머니라는 결혼과 가정의 굴레를 벗어나, 그 굴레의 고락(苦樂)을 예술과 맞바꾼 셈이 되었다. 여성이 화가가 된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한국 현대사회에서 조차도 불가능에 가까운 힘겨운 일인데,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은 어떠했을까? 나혜석, 최욱경, 전혜린 등등 –고락의 비극이 그들의 운명에 깔려 있되, 그나마 예술이란 이름으로 그 비극의 무게를 감내(堪耐)하는 것처럼 대중은 그것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일종의 카타르시스(Catharsis)?
각설하고, 이성자는 달랐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었고, 사회를 향한 자신의 전략으로 비극을 뛰어 넘는 이성의 힘이 강했다. 그것은 또한 프랑스이기에 가능했다.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혼자됨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그런 강함의 자기세계- 이것이 이성자의 국제성이다. 백남준의 예술세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국제성을 만날 수 있다. 백남준이 개념과 철학으로 첨단의 매체에 도전했다면, 이성자는 전통적인 유럽의 회화적 뿌리에 자신을 던졌다. 도전의 승산은 후자 쪽이 아무래도 불리하다. 그래도 칸딘스키 사후 유럽 최고의 추상화가로 추앙 받던 알베르토 마넬리(Alberto Magnelli)가 인정할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것도 추상으로 승부를 건 이성자의 치열함과 집중력은 가히 그가 이룬 국제성의 핵심요소라 할만하다.
태생적인 낙천성(樂天性)과 긍정성(肯定性)을 바탕으로, 여기에 미지의 세계를 철저한 자기 제어(制御)의 이성과 지성으로 도전한 것이 오늘날의 이성자를 있게 한 작가 정신이었다. 그러나 화가도 사람이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슬프면 울고, 나이가 들면 힘도 부치고, 지금은 돌아와 고향 앞에 선 우리의 노 화백(老 畵伯)은 이제 그만 쉬고, 우리는 그가 만든 예술을 더욱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간직하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