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의 예술론, 실존의 대지에서 키워 온 인간과 도시와 문명의 낙관론
2017-01-16<대척지로 가는 길>로 접어든 이후, 이성자의 회화는 더욱 빛으로 충만해졌다. 경쾌한 리듬을 간직한 수없이 많은 물감방울들로 화면의 곳곳은 더 밝고 화사해졌다.
무한한 공간의 어딘가에 음양론의 도상학에 기초한, 미래로 열린 도시들이 떠있다. 그 아래로 땅의 대변자로 모습을 드러냈었던, 눈 덮인 봉우리들의 순결한 기하학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깊은 파랑과 주홍은 차츰 격정이 순화된 색들에 자리를 내준다. 대기는 예민하고 깨지기 쉬운 여명의 그것에서 맑고 화사한 오전쯤으로 이동한다. 대척지로 가는 길, 그리고 별들의 축제, 은하수의 무도회, 하늘의 연회가 시작된다.
이성자의 세계는 ‘빛’의 세계다. 더 이상 어둠과의 거래는 없다. 대지의 계략들 억압과 예속, 소외와 부조리의 담화들은 더 이상 취급되지 않는다.
회화는 노래가 되고, 환희와 열정으로 추는 춤이 되었다. 춤과 노래, 환희, 축제•••이 시대의 개념화된 예술이 일찌감치 멀리 추방해버린 것들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것들이 전위성의 상실로 읽고 싶어질 수도 있다. 부당한 실존을 외면하는 지적 태만이 아닐까 묻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뿌연 회색조의 그림쯤을 그런 지적 담론의 전범으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둘-참 흥미로운 대조가 아닌가-. 그러니까 이성자와 리히터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단지 ‘취향’이나 ‘입맛’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스타일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리히터 회화의 전위성은 세상에 대한 태도라기 보다는 그 자신의 고백처럼, 그의 내면에 어떤 혼돈에 기인한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G.리히터) 정직한, 그래서 지적이고 세련된 고백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일관성도, 충성해야 할 가치도 없으며, 한계가 없는 불확실성에 던져진 채 매 순간 다만 임의적일 수 밖에 없을 뿐이라면, 단 한순간도 생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게 더욱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더구나 “인간은 자신이 바보라고 자주 말하면, 정말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졌다.”(파스칼) 흥미롭게도, 이 시대는 삶의 부조리로부터만 영감을 취하는 편향을 지성으로 간주하려는 자학적 경향을 보인다. 냉소, 자조, 우울감, 비난, 견유주의, 무력감, 피해의식 같은 것들이 문명과 사회 앞에서 지적인 영혼이 취하는 더욱 고양된 반응인 것처럼 부추긴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고백이 후폐한 실존 안에서 사는 동안 부득불 전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삶을 생명의 약동으로 이끄는 것과는 종무관한 참담한 고백일 뿐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기계문명을 비판한다. 하지만, 피해자로서 그렇게 한다. 물질만능과 세계화와 인간의 소외와 노예화를 비난한다. 그러나 역시 피해자나 무기력한 어릿광대로서 그렇게 한다. 이러한 당대의 미학적 태도에 대해 이성자는 부드러운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성자는 서양-물질, 동양-정신 사이의 대조에 의해서 화가 났었으며, 한평생 그 대단한 정렬과 열정으로 양자를 화해시키기 보다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우주적인 예술로 껴안으려 애써왔다.”(베르나르 슈네르브)
이성자는 실존의 부조리를 붙들고 흐느끼거나. 자조와 우울감에 취해 다만 ‘더 이상 아무 것도 건설 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식의, 만연한 당대 미학을 도도하게 밟고 지나간다. 이성자에게 실존의 불리한 조건들은 투덜거리고 자빠질 수 밖에 없는 요인이 아니라, 넘어서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작가를 따르면, 하루가 멀다고 변해가는 세상을 허겁지겁 뒤쫓으며 늘어놓는 낙오자의 넋두리나 듣기 위해 신이 예술가를 역사의 시점들에 준비해 두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에게 재능이 주어진 이유는 결코 회색빛 회의주의의 포로가 되거나 시종 콧방귀나 껴대는 난삽한 견유주의에 목덜미나 붙잡히는 것에 있지 않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에게는 역사적 임무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인류가 요구하는 새로운 미래로 앞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회화가 통곡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절규하고, 뼈 속 깊이 회의와 우울감에 빠지고, 악몽에 시달리는 표현의 시의적 경향과 무관한 것이 되도록 한 예술론이었다.
물론 그것은 삶이 부조리하고 고단할수록, 더욱 미래를 그리고 희망을 노래해야 하리라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가 지적한 바 있듯, 한 예술가의 조형방식은 ‘영혼의 상태(un etat d’ame)며, 정신의 결(une disposition d’esprit)’이다. 이성자의 조형은 곧 그 삶과 신념의 총체적인 표출인 것이다. 작가의 예술론에는 이 시대의 미학이 망각하고 상실하고 있는 것에 대한 회복이 선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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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성자의 <대척지로 가는 길>과 <갤럭시>에서 단지 반짝이는 별들의 축제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위협받지 않는 평화와 순결한 대기에만 한껏 취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 지불되어야 했던 것들의 눈물겨운 목록, 곧 그 보이지 않는 대척점을 보기 위해 이성자의 손에 쥐어 있는 실존의 뜨거운 이력서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1951년, 프랑스에 정착한 최초의 한국여성작가, 전쟁과 ‘천국으로부터의 추방’, 곧 가족과의 이별, 피와 상처의 기억들, 영혼의 근원에까지 잡힌 주름, 그리고 이방인의 고독과 혼돈과 직면한 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예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던 화가••• 화가로서도 그의 여정은 이중적인 소외의 연속이었다. 한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한국, 어느 곳에서도 전적으로 소속될 수 없었던 두 대척지의 틈새에서 상실이 곧 정체성이어야 했다. 양자 모두에서 교묘한 편견과 자신의 성과에 상응하지 못하는 평가가 천연덕스럽게 있어 왔다.
이성자에게 실존은 늘 이별과 떠남을 의미해왔다. 서울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서울로, 그리고 여성과 어머니의 끝으로 사는 것 또한 그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진정한 존재론적 담론이 도약해 올라오는 법이다. 존재의 본질이 소외의 한 가운데서 가장 투명하게 포착되듯이. 이성자의 대척지, 별과 은하수와 우주와 미래도시는 실존의 가장 깊은 주름이 잡힌 바로 그 곳에서 잉태된 것이다.
결국 이 아름다움과 축제는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무엇보다 작가로서 편안과 안전을 제공하는 조건들에 전적으로 소속될 수 없었던 시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미래도시 또한 대립과 충돌을 양산하는 생의 조건들 적자생존과 추방과 소외의 도시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기에 이 대척지로 향하는 길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순수하며, 가장 환상적인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젠가 T•S 엘리어트가 찰스 윌리엄스(Chales Williams)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작품만 못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작품보다 더 낫다. 그런데 찰스 윌리엄스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책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삶과 그의 글은 동일하다”
이성자가 일궈온 회화 역시 그가 살아온 삶과 동일하다. 이성자는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 해 살았고, 미의 영지에서 그가 거두어들인 소출은 무엇이건 이와 무관치 않다. 작가의 예술적 성취는 그가 인간으로서 싸워온 대지에서 자란 식물인 것이다. 이성자의 예술론은 미(美)가 삶의 굽은 마디를 경유해 나온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단지, 또는 순수하게 미학적인’등의 수식어는 여기 설 자리가 없다. 작가의 회화는 구성과 형태와 안료의 조합 이상이며 행위의 결과 이상이다. 아무리 자율적이고 자유분방한 터치하나에도 이미 실존의 주름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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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은 자신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쓴 한 편지에서, 기하학은 정확한 추론과 고도의 지적에는 귀중하지만. 하나의 일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쓰고 있다. 파스칼은 수학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을 발견했다고 그의 『팡세, Pensees』에 적고 있다: “수학보다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이 더 적다. 사람들이 다른 것들만 파고드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을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에 대해 우리의 어린 판단으로 다 알 수 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예술들’-모든 예술이 아니다-은 부단히 그 통로가 되어 왔으며,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예술이 그 같은 질문과 답에 전혀 내적으로 닿아있지 안다면, 그것은 한낱 시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부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예술이 어떻게 우리로 인간에 대한 심오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는가를 따져 묻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당신은 그 예술로 인해 인간의 심층으로 더 나아가는가? 당신은 그것을 통해 인간의 내적인 고독을 발견하고, 그 때문에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론적 상흔들과 직면하며, 그것들의 치유에 대한 열망과 형제애로 도약하는 가? 또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당신의 진정한 본성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는가?
나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당신이 이성자의 그림앞에 잠시 머무는 것이 당신에게 충분히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국립판화 보관소의 클로드 브레(Claud Bouret)가 말한 것처럼, 이성자의 회화가 당신을 도울 여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가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우리가 보지도 않고 믿짇 않는 신비에 접근시켜주고, 우리들 자신과 세계를 깊이 인식케 해주고, 확대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바라단. (…) 비록 우리가 이 아름다움의 의무를 소홀히한다 하더라도 , 예술가의 이 기본적인 요구를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이성자의 작품 속에 화신된 것은 바로 이러한 심오한 충실성이다.”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