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의 여대사 이성자의 작품세계
2017-01-16동녘의 대사
이성자 여사가 프랑스에 정착하여 화업을 영위해 온 세월을 따지면 어언 45년이 된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파리 화랑계의 명문이며 에콜 드 파리의 진원지인 샤르팡티에가 여사의 유니크 한 세계를 인정했고 초대했던 게 60년대 초였다. 삼십 년 전의 일이다.
여사의 입장에선 파리에 정착하여 십 년 만에 이룩한 경사이기도 했다. 샤르팡티에의 초대작가가 된다는 건 화가의 꿈이며, 특히 파리에 거주하는 외국인 작가들에겐 환상적인 현실이기도 했다. 그간 많은 한국 화가들이 파리를 거쳐갔지만 샤르팡티에가 맞아들인 건 여사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파리는 지난 날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없게 되었던 것이며, 미술가들의 메카인 코스모폴리스의 중화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샤르팡티에도 그 존재이유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사정으로 여겨볼 때 이성자여사의 예술은 저물어가는 파리화단의 종막을 노을처럼 장식했던 빛으로 회상해보게 된다.
샤르팡티에 초대전의 산파역이었으며 전시구성의 실력자였던 G. 브다이유는, 당시의 작품을 가리켜, 멀고 먼 외진 동양으로 초대하는 예술사증으로 비유하고 있었다. 동양으로 가려면 여사의 작품을 통해서 예술여정의 길로 들어서라는 뜻이었다. 여사의 작품은 분석하고 따지기 전에 이미 이쪽으로 스며들고 젖어들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별빛은 자체의 힘으로 빛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그 빛을 보고 있는 눈은 가르쳐 주지 못한다. 보는 것은 반드시 아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이 없었다면 별빛도 없다. 여사의 빛은 지금 작품의 표면 위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 빛의 원천은 저 미지의 지표너머에 있는 동양의 사상과 시정을 반사하고 있다는 뜻을 브다이유는 은유적으로 말했던 것이었다. 여사의 작품이 유발시키는 이러한 인상은, 파리시립미술관장이었던 J. 라세뉴에게서도 같은 문맥으로 반영되고 있었다. 「이성자씨는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라고. 이후 여사는 「동녘의 대사」라는 애칭으로 통하게 된다. 새벽은 동녘으로부터 밝아오며 그것은 미지의 지표위로 솟아오른다는 것이었다.
미풍의 줄무늬
여사가 파리에 정착하는 건 한국동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951년이었다. 처음에는 의상디자인이 목적이었으나 뜻을 고쳐 회화작업을 시작한다. 모딜리아니, 수틴 등등 에콜 드 파리의 선배들이 드나들던 유서 깊은 아뜨리에 그랑 드 쇼미에르에서 기초과정을 이수한 다음 앙리 고에츠 교실에서 본격적인 작업에 몰입한다. 50년대 중반기의 그의 제작기법은 붓으로 그리는 전승기법이 아니었다. 얇고 반듯한 자그마한 나무조각의 한쪽에 묻힌 안료를, 직접 캔버스 위에 찍듯이 묻혀나가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린다기보다 찍거나 바른다는 표현이 적절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붓으로 칠할 경우, 잘못된 부분을 뭉개버리거나 교정이 수월하지만, 가느다란 선맥 같은 색의 흔적을 무수하게 찍어나가는 이러한 작업은 그 수정이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제작하기 전에 정밀한 사전 계획이 요구되는 것이며, 튜브에서 짜낸 안료들을 파렛 위에서 혼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덧칠이 불가능한 일이어서 앞으로 화면을 구성해야 되는 안료의 색상들을 정성껏 미리 혼합하는 게 작업의 수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경과는 타피스트리의 제작과정과 닮은 데가 있었다. 또는 우리의 화문석 같은 돗자리가 짜여지는 물성적인 작업경과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혹은 명주나 삼베 등의 피륙을 짜는 베틀의 구조를 떠올려 볼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리고 칠하는 미술이기 보다 짜고 엮은 미술이었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작업의 경과는 중세적인 정신노동의 유형을 연상시켰으며, 한국적인 인상으로는 베틀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스러운 여인상을 그려볼 수도 있었다.
당시의 여사는 파리 16그에 위치한 라느라그거리의 한 지붕밑방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으며 초기의 목판화는 모두 여기서 제작되었다. 외롭고 추운 이 독방에서 오직 판화제작에 일념했던 것이었다. 그의 목판화는 모두 음각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의 구성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수직과 수평의 선맥으로만 구성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작품에 대해 J. 라세뉴는 엑조티시즘(이국취향)이나 민속적인 경향에서보다 「물질의 일종의 화려한 파열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여기에서「파열」은 불꽃 같은 반짝임을 뜻하며 한밤의 허공에서 찰라적으로 빛을 내는 불꽃의 인상을 환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화려한 파열」에서 프랑스는 지난날의「파열」이었던 신인상파의 분할법을 상기하려는 듯이 보였다.
신인상파는 프랑스의 색채학자 E. 슈브레이의「색채대비」에 영향 받은 바 있었다. 그는 원래 과학자였으나 프랑스가 자랑하는 고브랭의 직물을 구성하는 색채효과를 연구하는 책임자로 국가가 초대했었다. 직물은 실로 짜며 색실 한가닥 한가닥이 독자적으로 갖는 색들이 직물로서 배열되는 경우, 서로 어떻게 색채 조화를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는「동시적인 콘트라스트의 법칙」이라는 연구보고를 발표하며「두 개의 다른 색을 줄지으면, 그 색과 색의 강도에 따라 서로 변화하여 보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했던 것이었다. 여기서의 변화는 색채가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는 눈이 변한다는 뜻이며, 한가닥 한가닥의 색은 가까이서 보면 구별되지만 떨어져서 보면 혼합된다는 게 그것이다. 이것을 그는 「감각적인 색의 혼합」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원리로 다채로운 색감의 직물을 짤 수 있다고 보고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쇠라, 시냑 등에게 기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며 그들의 미의식의 본질적인 요소인 필촉의 계통적인 세분화에 기인하는 이른 바 분할주의(디비져니즘)를 분석하게 했던 것이다. 분할주의는 이러한 색채의「동시대비」라는 실증적인 기법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점묘법은 분할주의의 기술적인 보조수단인 것이었다. 그리고 분할한다는 건 빛의 광휘와 색채의 조화를 미리(아프리오리)확보한다는 것이며, 순수한 색소의 시각혼합과 고유색과 반사색 그리고 빛 등이 색의 요소들을 구별하는 것과 이러한 요소들의 균형(콘트라스트)과 확산(빛의 발광)의 법칙을 방법론적으로 터득한다는 걸 말한다. 한편 이 무렵의 자신의 작품을 두고 여사는「미풍의 줄무늬」라고 했으며, 가스통딜은「매혹적인 절제의 색채로 일상의 훌륭한 신비를 불러일으킨다」고 평한 바 있었다.
비원
이성자 여사의 구성세계는 이상의 예시로 여겨볼 때, 프랑스인에게 쇠라와 시냑 등의 기법의 변주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이 그들의 화화 감각을 충족시켰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프랑스 적인 품성으로서의 회화양식인 첨증성과 중용성 그리고 온건성이 전체의 화면을 지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근대회화의 전통은 세잔이 구성하기 시작한 수직과 수평에 패러다임인 객관적 회화의 계보로 유래되며, 전후의 세계미술의 판도가 주관적이고 격정적인 추상표현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파급되기 이전까지의 파리화단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이었다. 18세기로부터 전래되는 프랑스의 국가시책의 으뜸은 문화정책인 것이었고, 선진문화는 프랑스인이 자부하는 민족적 인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게르만적이고 슬라브적인 본능예술은 혐오와 거부의 대상이었던 것이었다. M. 지우르라는 프랑스의 평론가가 공언한 바 있듯이, 회화에 있어서의 추상화와 표현화는 인종적인 입장에선 결코 프랑스적인 게 아니며 또 실제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서 데카르트적인 프랑스인의 기질을 들며, 그것은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며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프랑스가 자부했던 예술감감ㄱ이었으며 50년대 당시의 파리화단은 아직도 이것을 고수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술의 태양은 더 이상 파리의 지표위에서만 떠오르는게 아니었던 것이며, 그것은 중천에 떠서 이제까지 그늘졌던 게르만의 두메산골과 슬라브의 광야 그리고 후기 산업사회의 범속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현실을 고루 비치게 되었던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파리의 영광은 불가피하게 퇴조하며 거칠고 사나운 추상표현주의가 새로운 물결로 세계 미술의 판도에 넘실거리게 된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와 무관할 수 없다는 부득이한 정책으로 조직한게 이른바「레알리떼 누벨」이었다. 이 전시는 당시의 관례로는 매우 획기적인 초대형식이었으며, 추상화가 이백명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전이기도 했다. 알만한 작가들은 들로이네, 피카비아, 그레이스 등인 원로화가들의 작품과 젊은 프랑스의 추상화가를 망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추상화전의 전체적인 유형은, 이지적으로 처리된 기하학적인 위상과 서정적인 색감으로 구성되는 추상화가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주최측의 의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을 나중에「차가운 추상」이라고 불리우게 되며, 보다 생명적이고 발생학적이며 그리고 시원적인 몸부림 같은 뜨거운 추상이 이것의 대극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향을 통칭 앵포르멜이라고 부르며, 50년대 중반의 파리화단을 리드하는 표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성자 여사를 이러한「레알리떼 누벨」이 초대하여, 보다 고전적인 전시유형인「살롱 드 메」에서도 그의 화면을 요구하게 된다.「살롱 드 메」는 독일하고의 레지스탕스를 문화운동의 입장에서 전개하려던데서 발달된 초대전이며, 피카소, 마티스, 루오, 비용 등 거장들을 위시하여 많은 저명작가들을 초대했던 것이었다.
날씰과 씨실이 엇물려서 짜여지는 수공업적인 여사의 작품과, 수작과 수평으로 엇갈리는모아레(moire) 같은 문양으로 된 여사의 화면은 하나의 화사한 베일로 비유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베일너머로 그들이 잃어버리게 된 지난날의 정취와 향수를 감지했던 건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미지의 나라였던 극동에서 어느 날 홀연히 찾아든 한 동양여성이, 자제와 인내 그리고 학습과 숙달의 경지를 가지고 엮어내는 화면에서, 예술을 대하는 본연의 태세를 보았던 건지도 모른다. 예술의 딜레탄티즘을 기피하고 거부의 반응을 보이는 프랑스기질은 보수적 성향으로서의 문화감각을 선호하며, 여사의 작가적 태세에서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당시의 지도적인 평론가였던 가스통 딜은 이러한 여사의 베일너머에 인류공동의 미의식을 배망하는 비밀스러운 미술의 정원이 있다고 평한 바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성자 여사는 세월을 조화롭게 엮는 것처럼 배열하고 다채롭게 하며 변주하는 기호의 언어를 우리로 하여금 해독하는 습관을 갖게 하였다. 나는 놀라운 솜씨로 정돈된 그 불가사의한 비원을 여사의 기호 속에서 되찾았다고 생각해 왔다. 거기에는 여사의 나라의 궁전과 사원들이 숨겨져 있다.」
수액
이성자 여사의 예술표지는 회화작품은 물론 목판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는「나는 나무를 있는 그대로 선보인다. 다시 말해서 숲 속에서 산책을 하는 도중에, 나무의 형태를 고르고 나무의 자유로운 형체 그대로를 재료로 삼아 거기서부터 음각을 해나간다. 나는 이미 준비된 직사각형의 목판인, 마치 감옥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각이 진 형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형태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는 나무와 더불어 맘껏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그의 말처럼 나무는 그의 기본 소재인 것이었다. 초기의 그의 목판화는 관례적인 규격을 사용했던 것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무의 단층에 음각한 목판화가 그의 표지이며 따라서 그가 선택한 나무의 형상이 지면의 소지 위에 찍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1968년 남불의 뚜레뜨에 아뜨리에를 정한 후부터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여기서의 여사는 자연인이었으며 이는 인가가 드문 평원지대의 숲으로 둘러싸인 환경조건도 원인이 되었다. 자유롭게 자생하는 자연적인 나무처럼 자신의 예술도 자라나고 싶다는 게 여사의 염원이다. 여기서 가까운 까뉴 미술관의 D.J. 끌레르그 명예관장은 여사와 나무의 관계를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나무들이 있다. 이성자씨가 좋아하고 이성자씨를 좋아하는 나무들이. ••••••나무의 심장에 음각한, 그래서 심장과 심장이 만나는, 그 나무의 길이를 따라 자른 흔적을 제시하였다. 그 흔적들 위에는 대자연과 사랑에 빠진 이성자씨가 자신의 시를, 자신의 기호를, 수액에 바쳐진 그 노래의 악보를, 그 나무들의 생생한 수액을 새겼던 것이다」라고.
여기서는 나무의 자생적인 스타일을 빌어 인간의 창조적 본성을 비유하고 있다. 뿌리로부터 귀납적으로 흡수한 수액 덕분으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나무의 스타일은 무리가 없고 싱그러우며 자연스럽다. 여사는 자신의 예술도 이러한 나무처럼 자연스러운 스타일로 생성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예술은 나무가 자라나는 현상처럼 자연스러운 게 어렵다는 건가? P. 발레리는 그의「코로론」에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었다. 「•••••• 모든 예술은 말(paroles)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것이 문자로 적혀진 것이건 또는 적혀지지 않은 것이건 또는 직제적으로 나타내어진 것이거나 혹은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거나 간에 어떻든 이러한 하나의 언어충동은 우리들 인간으로 하여금 창작으로 나서게 하는 정신활동과 나아가서 이 기묘한 본능으로부터 탄생되는 예술적 작품하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즉 모든 예술, 가령 문학이나 음악 또는 조각이나 회화는 그 뿌리가 언어 충동에 의해서 유발 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대화의 기연을 내포하는 데서 비롯되며 그 궁극은 사람에게 알리고 사람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K. 야스퍼도 그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자성하는 가운데서 나만을 위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얻어진 게 없는 거와 같다. 진리는 두 사람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처럼 진리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할 때 그 일치는 말로서 이뤄진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말」의 본래적인 뜻은 스타일이며, 이것을 우리는 양식, 모양, 유형, 꼴, 틀 등으로 번역하고 있으며「스타일이 좋다」는 물체적 형식의 판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의 뜻을 우리의 말에서 가깝게 찾아보면「문체」를 가르키는 뜻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언어충동의 외연을 이「스타일」이라는 말은 함축한다고 하겠다. R. 바르드는「스타일」에 관해「개인적인 은밀한 신화 속에서 말은 그 몸 속에 숨겨져 있으며, 그 창작자의 비밀스러운 자족적인 언어이다. 거기서 말과 사물의 결합이 비로소 틈잡게 되며, 그의 실존에 관한 언어적인 위대한 주제가 한번뿐인 신체에 깃들게 된다••••••스타일이란 본래 싹이 트는 현상인 것이며, 그것을 일러 수액의 변용이라고 한다」 이어서 R. 바르드는 이 스타일을 어떤 의도가 먼저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선택의 결과로서의 문장체와 대립시켜서 그 지순한 요인을 강조한다.
이상에서 예시한 데로「스타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명의 형식이라고 하겠으며, 자연의 조물들은 각기 그 나름의「비밀스러운 자족적인 스타일」로 존재한다고 하겠다. 나무는 수액이라는 엣센스가 변용된 스타일로 지상 위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스타일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기술로서 있다고 여기는 게 자연감상법이다.
숲 속 오솔길의 고요함은 수목이 가지는 품위와 조화된 자연의 스타일을 우리 몸에 스미게 한다. 나무의 스타일이 그러한 대화의 뜻으로서 이쪽에 스며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말로 표현하는 영감, 직관, 감정 등은 우리의 존재의 깊은 그늘의 부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 심층의 부식토를 활성화하려면 자연감상이 효과적이다. 자연은 앞으로도 영원한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파리에 정착해서 십여 년간 여사는 긴장과 흥분이 거듭되는 작업의 연속으로 극도로 마모된 상태에 있었다. 남불의 인기척 드문 뚜레뜨에 아뜨리에를 정하게 되는 건 이러한 전쟁에 가까운 생활전선을 벗어나, 이제까지 이성의 능력으로 빼앗겼던 그의 무의식의 포텐시얼(잠재력)을 재충전하려는 데 있었다. 「나는 나무와 더불어 맘껏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건, 자연인 그 영원한 풍경과의 회우를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소에서 고갈될 뻔한 체액이 영원한 풍경 속에 잠재하는 수액을 만남으로써 싱그러운 수면으로 다시 넘실거리게 된다.
극지로 가는 길
현대작가 가운데서 특히 유럽의 작가들 가운데서, 자신의 입장을 중세적인 뜻으로서의 예술가로 상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 이지만, 후기산업사회에 있어서의 기계기능적인 가치체계와 복제예술의 범람과 획일적 대량화의 유사추이의 시대에 예술가는 어떻게 생존해야 되는가•••하는 인간회복의 염원이 이러한 의식을 갖게 한다고 하겠다. 전통사회의 예술가일수록 자신의 존재이유를 이런 데서 찾아보려는 경향이 짙다. P. 발레리도 전기한「드가론」에서「나는 때때로 예술가의 일이라는 것이 매우 고풍스러운 노동의 형식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예술가란 유물이며 소멸해가는 노동자 또는 쟁이의 일종으로 생각되기도 한다」고 예술가의 존재를 기우하기도 했다. 가령 도예공이라던가 공예가들의 노동형식에서 이러한 가내공업적이고 중세적인 잔영을 느끼게 된다고 하겠다. 이성자 여사의 목판화에서 지난날의 베틀을 짜던 여인의 수공업적인 잔영을 소급하여 느끼게 되는 것도 같은 문맥이라고 하겠다. 다만 그 소재가 다르고 표현형식이 현대적으로 변주되었을 뿐 그 작업의 경과는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그야말로 예술에 관한 지식은 달라져도 예술을 대하는 지성은 불변인 것인지도 모른다.
여리고 싱그러운 나무의 단면에 날실과 씨실 같은 음각으로 구성되는 여사의 세계에서 우리들 한민족은 떡살의 무늬나 와당의 무늬를 어렵지 않게 연상해 볼 수 있다. 또는 화문석 같은 짜임새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그리고 혹은 지난날의 한국여성이 몸에 지녔던 노리개라는 패물의 문양을 그려볼 수 있으며, 색색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사방형의 반짇고리와 그 속에 가지런히 담겨졌던 색색가지 모양의 자그마한 도구들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여사는 이것들을 직접 프랑스로 가져갔던 건 아니다. 이러한 오브제들 속에 잠재하는 정서의 내력을 가져갔던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성했는지의「수액의 변용」을 몸소「체액」으로 변용하여 실증해 보인 것이었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인식유형의 변환을 보편적인 정보로 압축하여 인류공동의 관심대상으로 제시해 보였다는 게 된다(paradigmatic symbol) 또는 상징적 변형(symbolic transform)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미술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는데 사명이 있는 건 아니다. 관심으로 하는 대상이나 내용을 그 특징적인 요소로 정보압축한 다음 이것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게 미술의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과학자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하는 핵심요인만을 추출하여 실재적인 근거를 실증하는 인식의 패턴과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라세뉴가 말한「파열」은 이것을 의미했던 것이며, 인상파의 인식유형을 과학자들의 귀납적추론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건 실제적인 일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시원적으로 생각하거나 느꼈던 게 아니라 그 몸을 움직여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시는 읊어야 되고 그림은 그려야만 나타난다. 예술이라는 관념이 먼저 있었던 게 아니라 시원적으로 있었던 건 노동인 것이었다. 지난 사십여 년간 여사가 보여주었던 건 이러한 노동의 연속인 것이었다. 이것을 미술의 일이라고 해도 좋다. 이러한 노동을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오직 일념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극지로 가는 길」로 떠났던 게 사십여 년 전이며, 그곳이 공교롭게도 파리였다. 상대적으로 파리는 이러한 여사의 노동의 장을 제공했던 것이며 여기서 오직 일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의 경과만으로 여겨볼 때 무아의 상태에서 단순노동을 거듭하는 베틀의 여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굳이 먼 나라까지 건너가서 일을 할게 무엇인가의 의문이 남는다.
한 작품의 태반이 되고 그 가치를 조건 지우는 기반구조가 파리에는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사가 보여주었던 건 전기한 베틀의 여인상인 자제와 인내 그리고 학습과 숙달의 연속이었다. 인간의 일을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여사의 작업태도는 많은 프랑스의 작가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되며, 상대적으로 한국적 소재를 구상적 보편으로 받아들이게 된 프랑스의 미의식은 그 영역을 그 미지의 부분만큼 넓히게 된다. 그야말로 예술은 국제적 관심의 영역을 예술적으로 넓혔다는 게 된다. 이것이 지난 사십여 년간 여사가 이룩한 공적이라면 공적이다.
프랑스의 판화보존관인 C. 브레는 여사의「극지로 가는 길」을 가리켜「인간이란 무한한 공간의 청명함속에서는 아주 왜소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기적적인 엄밀성을 믿어야 하며 그 이유는 그것이 대차점(여사의「극지」를 의미하고 있다=필자주)으로 이르는 길을 다행히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우리의 놀란 시선 밑에서 그 찬란한 색의 번쩍이는 새벽 무지개의 진주로 짜여진 머플러를 펼쳐 보여주는 이리스(빛의 여신=필자주)의 여신에게 현혹당한다」고 얼마간 감상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동양적인 음양의 사상을 요철의 형상으로 상징화된 주제들이 유영하는 무한공간을 상징파 시인 S.말라르메의「푸른 공간(azur)」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무한대의 시각대상인 푸른 공간으로••••••.
이러한 이성자 여사의 무심결로 독백하듯이 밖으로 낸 소리를 곁에서 들은 적이 있다.「여자는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게 아무래도 행복한 건데••••••」. 그러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었다. 가정적 본능과 예술의욕의 사이에 늘 잠재하는 마찰(friction)의 변수를 새삼 느끼는 듯 싶었다. 필자는 이전에 여사의「극지로 가는 길」을 요약하여 다음처럼 해설한 바 있다.「한 미술가의 생애는 우주를 떠도는 유영의 존재로 비유된다. 그가 의지해야 될 궁극은 자기자신뿐이며, 이러한 자율의 인과는 미술가의 생애를 외로운 자아의식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예술가의 고향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비유는 이로부터 유발되며, 한 한국여성인 이여사의 예술 여로는 이처럼 망망대해로서의 우주공간을 떠도는 극지의 길로 받아들여진다」.
1995. 1. 11
미술평론가 유준상